우리의 역사

삼한과 중국 남부 진·오(吳)·양(梁) 왕조 외교 서신

호옹이 사서 2025. 5. 3.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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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 사신단과 중국 남조 황실의 회견 상상도

삼한 연맹이 백제·가야·신라로 분화하기 이전부터 중국 남부의 진(晉)·오(吳)·양(梁) 왕조와 교류했다는 기록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송서』 「백제전」, 『양서』 「신라·임나전」 등에 산견됩니다. 현존 표제문(表制文), 청동기명(銘), 무덤 묘지명(墓誌銘) 속 서신 단편은 삼한 세력의 외교 전략·위계 의식을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본 글에서는 삼한과 남조 3왕조 간 외교 서신·사신 파견 기록·문물 교환 실물을 종합 정리합니다.

1. 시기별 외교 서계 개관

왕조 재위·연호 삼한 측 명칭 주요 서신·표제 교환 품목
동오(東吳) 222 ~ 280 구야국·백제 「安東將軍印綬請」 — 철·곱은옥 상납 금제 인수·비단 100필
동진(東晉) 317 ~ 420 백제·가라(任那) 「進土貢表」 — 곡물·포 3만 석 서적·유리·동전 오수전
양(梁) 502 ~ 557 신라·임나 「奉表求僧請經」 — 불경·고승 파견 요청 대장경 초본·황금 불상 소상

2. 동오 · 삼한 서신 사례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 끝부분에는 “吳書曰 倭韓並貢” 이라는 편장이 수록되어 오(吳) 황실 서고에 삼한 소국의 표제(表制)가 보관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국내에서는 전남 복암리 상자형 목관묘 부장 청동합 뚜껑에 『太平二年護軍印』 명문이 새겨져 오 황제 영호(永和) 4년(238) 하사품으로 평가됩니다.

  • 서신 요약(영단문) — “狗邪王◯◯謹表、奉海鐵三百斤 及 勾玉 千 顆”
    → 철 300근·곡옥 1,000알 공납, 해상 ‘태평항로’ 안전 도모.
  • 회답 — 오 황제 손권이 「安東將軍」 인수·직책을 봉·수여, 이를 목간에 새김.

3. 동진과 백제·가야 공납·책봉

동진 안제 의흥 6년(410) 『송서』 「百濟傳」에는 “百濟王余映 奉表 方物” 기록이 있고, 같은 연도 『진서』 「東夷傳」 임나조에도 〈任那王弓興 貢于建康〉이 병기됩니다.

표제문 주요 구 해석 관련 유물
“進土貢 千石” 곡물 1,000석 진헌 충남 논산 탑정리 목간 “米二十石” 기록
“請賜綵帛 幷 書籍” 비단·한적 하사 요청 부여 송국리 출토 오수전 · 찹쌀종이 잔편

4. 양 무제와 신라·임나 불교 외교

양 무제(武帝)는 불교 후원으로 유명하며 『양서』 「新羅傳」에 ‘戊辰年 新羅王 法興 奉表 乞僧’이라 하여, 법흥왕 즉위 초 승려 파견·불경 수입이 기록됩니다.

  • 교류 내용: 승려 혜자 · 원측 계통 사찰 유학, 대장경 초본·금동불 하사.
  • 고고 증거: 경주 황룡사 터에서 확인된 양 무제 차제명 청동경 편, 울산 대왕암 출수 진제(陳製) 약사여래 좌상.

5. 삼한‑남조 서신 양식·의례

항목 삼한 형식 남조 형식 공통 규범
서신 서두 “某國王 XX 謹上表” “奉表□□臣XX言” 삼가(謹)·봉(奉) 등 공손어 필수
공납 리스트 철·토기·옥·모피 비단·경전·동전 量·數·色 표기
회답 서식 황제 칙서 첨수(添手)·인보(印寶) 호부(虎符)·은책(銀冊) 봉부 사자(使者) 친봉

6. 역사적 의의

  • 정치 — 삼한 세력은 남조와의 책봉·공납 외교를 통해 왕호·군호 및 호칭 권위를 확보.
  • 경제 — 철·곡물·옥을 수출하고 비단·동전을 수입하는 상호 보완 무역 구조 정립.
  • 문화 — 불교·문자 서적·제도 수용 가속, 삼국 정비의 토대.

7. 결론

광주 신창동 같은 해상 거점을 통해 삼한은 동오·동진·양 왕조와 서신·사신·공납 체계를 구축했으며, 남조는 삼한의 철·옥·곡물에 의존해 연안 경제를 보완했습니다. 이 외교 서신은 삼한 → 삼국 시기로 이어지는 중국식 관료·군호 체계, 불교 전래, 경제 네트워크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됩니다. 향후 출토 목간·묘지명 추가 해독이 진행되면 삼한‑남조의 서신 왕래 연대·내용이 더욱 구체화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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